루트 메탈리카
철의 골목, 철의 시간, 을지로에 퇴적된 철의 역사
〈루트 메탈리카〉
세 번째다. 수능 한파와 함께 기어코 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우리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또다시 마주한 거리두기의 쓰린 발톱에 자영업자들은 한번 더 눈물을 훔쳤고, 예술계 역시 힘겹게 준비한 올해의 마지막 청사진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지난 호 취재를 인연으로 흥미를 갖게 된 전시회 〈루트 메탈리카〉도 개관 열흘만에 무기한 휴관이 결정되었다. 이대로 폐관을 기다리긴 아쉬웠던 필자는, 거리두기를 유지한 채 취재할 수 있는 것을 빌미로, 개인적 기대와 함께 조심스레 연락을 취해보았다. 센터 측의 반응은 호의적이 었고 전세 내듯 텅 빈 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을지예술센터가 위치한 산림동의 철공소 골목은 늘 부산스럽다. 금속을 깎고, 자르고, 연마하는 예리한 절삭음이 거리에 넘쳐난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이곳에선 금속과 금속이 맞닿으며 발생하는 소음이 거리의 활기를 대신하고 있다. 금속뿐 아니라 고막마저 갈아내는 소음은 필시 청력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다.
안 좋을 것이 자명한데도 철공소 장인들은 거리에서 가장 평온한 모습으로 오늘도 무언가 제작 중이다. 골수 메탈 팬이자 익스트림 메탈 드러머인 나는, 주변의 저항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목표만을 향해 분명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메틀러의 그것과 몹시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몇 년이나 일해오신 걸까, 10년, 아니면 20년? 어쩌면 산림동 일대에 철공소 골목이 형성되던 시기 부터 쭉 자리를 지키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을지로는 해방 이후 형성된 도시 공업 단지이다. 1960년대 도심 재건 계획, 1970년 중반 강남 개발, 1990년 신도시 건설. 실용과 합리를 내세워 끊임없는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근대화의 산실로 을지로 철공 단지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시간이 흘러 산업의 저변이 바뀌고, 점차 커져가는 도심 속 욕망의 이해관계는 더 복잡하게 얽혀갔다. 을지로 일대를 터전으로 근대화에 이바지한 이들도 빠르게 변화하는 거대한 흐름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낳아준 을지로 일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야 만다. 을지로는 조각조각 분리되어, 구획이 나뉘고 산업은 분절되었으며, 거주민은 내쫓기고 이방인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지금의 을지로는 누군가의 일터이자, 창작의 장소이며, 젊음의 핫플레이스이자 부동의 욕망이 뒤섞인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하지만 을지로는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 중이다. 여전히 제조업의 장인들은 거리의 큰 갈래를 형성하고 있고, 분절된 이해관계 속에 예술가라는 새로운 줄기가 싹을 틔웠다. 을지로라는 작은 용광로가 근대 제조업을 지탱하기 위해 들인 묵묵한 노력은 철의 시간이 되어 을지로 거리에 켜켜이 쌓여 있다. 〈루트 메탈리카〉는 퇴적된 철의 이야기가 담긴 을지로의 장소성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근대 제조업의 산실이자, 예술가들의 밀집소. 을지로 일대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한 산업은 현대 예술과 어떤 구조적 결합을 띄고 있는가. 철의 경로를 따라 살펴보는 을지로의 과거와 현재.
어둑한 건물, 철제 계단을 올라 3층에 위치한 을지예술센터에 도달하면 실외로 연결된 밝은 전시장이 펼쳐진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정성윤 작가의 〈Goodbye〉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레버를 돌리면 상단의 「GoodBye」가 끊임없이 돌아가도록 설계된 이 장치를 통해 제작자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 했을까.
손쉽게 돌아가는 레버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헤어짐이었을까, 하찮은 이별로 기억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 속에, 인간관계의 허무와 무상만 공허하게 메아리쳐 돌리던 레버가 지겨 워질 즈음, 가까운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암막을 제치면 나타나는 김준 작가의 〈다른 시간, 다른 균형〉은, 어둠에 잠긴 을지로 골목 어딘가를 그대로 모방해온 듯하다. 서서히 밝아오는 거리와 지저 귀는 새소리로 동이 틀 무렵이라는 걸 유추할 따름이다. 이따금 들리는 인기척은 또 다른 오늘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의 애환인가, 한바탕 젊음을 탕진하고 새벽이 돼서야 아쉬운 걸음을 옮기는 젊은 날의 과욕 인가. 철제 컨테이너로 구성된 전시장이, 생기를 되찾기 직전인 이곳의 을지로 스러움을 더욱 배가시켜 준다. 가만히 서서 을지로의 새벽녘을 체험하고 있으면 무언가 경을 외는 듯한 소리도 들린다. 매일 아침 을지로에선 종교의식이라도 행해지는 걸까. 아직 잠들어 있는 설치 공간을 뒤로하고, 다음 전시장으로 발을 옮기자 이번엔 밝은 장소가 나타났다.
다양한 오브제가 얽혀서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전장연 작가의 〈숨을 고르고, 정지 (Pause)〉는 금속의 복원성에 주목하여 설치된 작품이다. 요가매트, 탄력밴드, 보호대, 공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을 빌려 금방이라도 풀려날 듯 한 동세를 표현했고, 용수철이나 사슬같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물성을 지닌 금속을 덧댐으로 분산을 억제하고 운동에너지를 포용하여 불균형 속 균형을 추구한다.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평온을 유지한 이 작품들은, 센터 건물의 진동에 따라 균형점이 미묘하게 변화하며 이 공간에 생기를 더해준다.
다음 전시장을 향하다 보면 또 다른 작품이 근처에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얼핏 〈숨을 고르고, 정지 (Pause)〉의 일부로 착각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변상환 작가의 〈Live Rust〉다. 나무를 사용하여 건설 현장에서나 볼법한 철골을 구현한 이 작품의 뒷면엔, 실제 H빔을 붓처럼 사용하여 나타낸 다양한 형태의 형강*이 그려져 있다. 살아있는 녹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자국을 겹겹이 찍어 표현한 이 작품은 마치 생명체가 지나간 발자국 같아 보이기도 한다.
오직 상승 곡선만을 취하는 부동의 가치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막연함으로 답답해진 가슴을 안고 걸음을 옮기다 보면 이내 새로운 공간에 도착한다. 어두운 공간 속, 싸늘한 온도와 차가운 질감의 가구들로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이번 전시품 중 금속의 물성이 가장 직접적 으로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이학민 작가의 〈호기심의 집 House of Curiosities〉이다. 얼핏 친숙하면서도 기괴한 형상을 지닌 조형은 우리가 익히 접해온 가구와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것들에 손발이 달린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VOL.024를 통해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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