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독과 침묵의 시간 | 작가 손정기

어딜 가나 온전히 혼자가 되기 힘든 도시 안에서 주변에 신경 쓰이는 것 하나 없이 오로지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도시를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내 멀리 나가질 못하고 아쉬운 대로 집 앞 공원이나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때우는 것은 필자의 얘기다. 손정기 작가의 그림을 보다 보면 어느새 그림 속의 인물이 내가 되어 그 안에 있는 나를 느낀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절벽 끝에서 느껴지는 아찔함을 더한 상쾌함까지. 특별히 어디를 가지 않고서 그의 그림을 통해 고독한 여행을 떠나 보려 한다.

먼저 본인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정기라고 하고요. 제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주로 침묵과 고독의 시간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드럼을 전공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16살 때 우연히 드럼을 접하고 나서 5년 정도는 거의 음악에만 집중했었어요. 다른 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을 정도로 음악에 재미를 느끼고 미쳐있었죠. 그러다 입대를 하게 되고 복무 기간에 손을 다치는 사고가 한번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연주를 쉬어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면서 회복기를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휴가 때 심심풀이용으로 갖고 들어온 스케치북에 조금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림은 훨씬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지만, 사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려왔고, 전역 후에도 복학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그림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그림을 배우신 경험은 조금도 없으신가요? 작가님 작품을 보면 혼자 터득하셨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아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만들기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고, 학교 다닐 때 수상 이력도 꽤 있었어요. 사실 그림은 실제 눈으로 봤을 때 하고 느낌이 많이 다르잖아요. 이걸 어떤 식으로 그려야 내가 보고 느끼는 대로 표현이 될까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따라 그리다 보니 그게 쌓여서 저만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그렇게 군대에서 그림에 다시 재미를 붙이고, 잡지나 인터넷을 보고 사람이나 동물, 자연, 건축물 등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리다 보니 그때 집중적으로 그림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음악 이전에 미술 쪽으로 진로를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세요?
어렸을 때 주로 만화를 따라 그리다 보니 만화가를 꿈꾼 적은 있어요. 또 제가 영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그것들을 제 만화로 다시 그리는 것을 즐겨했었죠. 예를 들어 해리포터 1편을 재밌게 봤어요. 그러면 그다음 편의 스토리가 너무 궁금하잖아요. 그렇게 2편, 3편을 혼자 상상해 가며 저만의 만화를 그리곤 했었죠.

작가님의 상상으로 그린 해리포터라니 너무 궁금한데요. 당시에 그린 만화들이 아직 남아있나요?
집에 다 있어요. 하루 종일 그렇게 놀다 보니 그때 그린 만화들을 겹겹이 쌓아 철한 다음 만화책처럼 만들 정도였죠. 지금의 그림들과는 많이 달라 보여 드리기엔 너무 창피하네요.

끝없이 파고들면
선명해 지는 것들

과거의 드로잉들은 지금 하시는 작업과 느낌이 많이 달라요.
본격적으로 제가 그림에 뛰어들고 나서는 주로 외부적인 것들에 집중을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당시에는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에 중점을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도들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지금처럼 고정적인 주제나 메시지를 갖고 그리기보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 귀여운 것, 예뻐 보이는 것들을 계속해서 그리곤 했었어요. 계속해서 그려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그런가요? 오늘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고정된 주제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특히 댄서를 그리신 작품에서는 기존에 주로 그리신 선형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느껴졌는데요, 그들에 주목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종교적인 것들을 모두 제쳐두고 인간의 존재만을 바라봤을 때, 사회적인 통념이나 도덕적인 관념을 완전히 벗어던진 우리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불안정한 존재가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그다지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나름의 의미들을 만들어 나가면서 삶을 유지해 나가요. 그게 종교가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직업이 될 수도 있고, 하물며 나 자신이 되기도 하죠. 이처럼 무의미에 저항 하며 각자의 의미들로 삶을 지탱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어요. 또 한편으로 이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죠. 이 아름다운 몸부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했을 때 떠올렸던 것이 바로 무용수였어요. 기존과는 다른 표현이라 보시는 관점에 따라 춤의 곡선이나 관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고 느끼실 수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움직임 자체에 집중을 했던 것 같아요.

MONOBOAT

손정기 작가는 그림을 통해 자발적인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제공하고, 명상과 사색을 통해 자신의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하고 공유한다는 철학 아래 모노보트를 운영 중이다.
“2019년에 잠시 쉬고 싶어서 프랑스에 10개월 정도 장기 체류를 한적이 있어요. 할만한 걸 찾다가 우연찮게 기공* 체험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혼자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때 제 숙소가 프랑스 리옹에 위치했는데, 주로 창밖의 몽블랑 산을 바라보며 명상하는 걸 즐겼고, 그러면서 점점 마음의 평화도 되찾았죠. 그때의 경험들이 좋아 제가 가진 콘텐츠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고독 속의 풍요

2013년부터 SNS 계정에 꾸준히 작업물을 올리셨어요. 어느 순간 사람들의 관심이 평소보다 많아짐을 느끼게 된 시기가 있나요?
네. 확실히 있었어요. 사실 SNS 계정을 개설하고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없지는 않았어요. 전시회나 콜라보 제안도 생각보다 많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내가 진짜 작가가 됐구나.’하고 실감할 수 있었던 건 작년 10월 〈밤의 경계에서〉라는 테마로 제 개인전을 열었을 때예요. 그때 일주일의 전시 기간을 가졌었는 데, 대략 300분 이상 되는 관객분들이 찾아와 주셨어요. 그중 활동 초기부터 제 그림에 관심을 가지셨던 분들도 계셨고, 지인의 추천으로 찾아오신 분도 계셨고, 생각보다 많은 관심에 얼떨떨했었죠. 한편으로는 그동안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오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 제 안에 메시지들이 쌓였고,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님 전시는 항상 음악이 함께하나요?
네. 저는 무조건. 제가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과거에 음악을 했다 보니 거기서 영감을 얻는 부분이 정말 많아요. 작업할 때도 항상 음악을 틀어놓는데, 전시도 그때의 음악들과 함께 한다면 작업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들을 관객분들도 비슷하게 느끼실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죠. 실제로 그렇게 느끼신 분들도 계시고요.

최근 작가님의 작품을 한 줄로 정의한다면 ‘간결함이 주는 강렬함’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현재의 드로잉 스타일이 자리를 잡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느 시점부터 이렇게 그려봐야겠다 한 것은 아니 지만 영감을 받은 부분은 있어요. 제가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드니 뷜뇌브라고 하는 감독인데, 아시나요? 보통 영화에선 화려한 미장센으로 그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반면 그의 영화는 그런 장면에서 오히려 힘을 쭉 뺀 듯한 절제된 표현이 연출되는데, 그 부분에서 다가오는 메시지가 저한테는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필요한 것들만 보여주는 게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겠다 싶어서제 작업에서도 재료적인 면이나 연출적인 부분에서 그와 같은 방식을 적용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스타일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낯선 데서
찾은 여유

그림의 인물처럼 작가님도 주로 자연에서 고독을 즐기시는 편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자연을 그리기는 하지만 제가 느끼는 감정들을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는 편이지 그게 주제는 아니거든요. 저는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그런 시간을 만드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혼자 산책을 한다던지,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걸어간다던지,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혼자 명상을 한다던지. 장소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아요.

사진도 굉장히 잘 찍으시던데요.
찍는 걸 좋아해요.

주로 어떤 순간에 카메라를 드세요?
저는 여행 다닐 때 주로 많이 찍어요. 그중에서도 랜드마크나 관광 명소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카메라를 들게 되는 것 같아요. 유명한 건축물을 보러 갔다면 그보다는 그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거나, 길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을 담는 편이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골목에서 빨래하는 모녀의 모습에 이끌려 사진을 찍기도 하고요.

주로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시는데, 특별히 느껴지는 게 있으신가요?
여러 감정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선 앞서 말한 건축물은 제가 아무리 다른 각도, 다른 시선으로 찍어 보려 해도 이미 구글에 존재하는 사진들이에요. 반면 제가 주로 찍는 사진들은 흔히 어디에나 있는 사진이 아닌, 그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죠. 그런 면에서 저는 강하게 끌리는 편인것 같아요.

매년 좌우명을 정하시잖아요. 올해 세우신 좌우명은 뭔가요?
‘생의 한가운데’요. 루이제 린저라는 작가의 소설에서 가져왔어요. 거기에 니나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개인적으로 큰 감명을 받았거든요. 그는 타인으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주어진 삶이 좋든 싫든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인물이에요. 시간이라는 흐름에 맥없이 끌려가는게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죠. 저 역시 주어진 삶에 있어 충실히 살아왔으나 돌이켜 보면 아쉬웠던 부분들도 더러 있었던 것같아요. 그래서 올해는 나에게 주어지는 것들이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회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과감히 몸을 던져 열심히 살아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정했는데 쉽지 않네요. 자꾸 무너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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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매거진 9월호 vol.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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