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NESTA MARLEY, THE KING OF REGGAE BOB MARLEY

 [ 死者와의 인터뷰] ROBERT NESTA MARLEY, THE KING OF REGGAE 

‘Legend 매거진에서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전설적인 인물과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을 되돌아보는 ‘死者(사자)와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그들이 당대 최고의 인물로 우리 기억 속에 오랜 시간 남을 수 밖에 없는 강인한 사상과 철학, 그리고 고뇌와 좌절의 순간을 함께 나누며 무리가 직면할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이겨낼 힘과 지식을 얻고자 한다. 
“死者(사자)와의 인터뷰'의 첫 손님은 자본주의 사회가 돌팔매질처럼 거침없이 내던지는 핍박과 불평등에 '음악’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무기로 그들과 당당하게 맞선 ‘레게의 황제, 밥 말리'를 만나 그가 미처 우리에게 전하지 못한 가슴 깊이 숨겨둔 인생 이야기를 진솔히 나눠봤다. 

‘하이~ 밥’이라고 하면 좋을까? 아니면 ‘하이~ 말리 씨’ 해야 할까? 인터뷰 전날 밤 나는 숙소에서 설렘에 잠 못 이루며 처음 만나 건넬 인사말만 되새겨 보았다.

T: 안녕하세요. 말리 씨 
B: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I LOVE SOUNDCAT, I LOVE LEGEND, YEAH~!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자메이카까지 왔으니 우리는 블루마운틴을 한잔씩 앞에 두고 이 세 상에 두 번 다시 없을 인터뷰를 시작했다. 

레게음악과 레게머리 스타일의 창시자라 불 리는 밥 말리는 오늘도 변함없는 드레드 헤어 다.

T: 사실 2000년대 초반, 제가 악기제조 회사에 다닐 때 레게머리를 한 적이 있었어요. 동료 직원이 저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놀라 들고 있던 커피를 쏟고 손을 데인 적이 있었죠(웃음) 레게머리는 그만큼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머리 감기조차 버거운 레게 머리를 언제부터 고수해 오신 건가요?

B: 하하, 지금 제 앞에 계신 아름다운 모습에 레게머리라니 쉽게 상상이 안되네요 (웃음). 그렇죠. 레게머리가 좀 파격적이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그런 스타일이긴 해요.

제 나이 23살 정도 됐을 때로 기억해요..당시 저는 가톨릭에서 라스타파리안으로 개종했는데 그때 처음 머리를 땋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저는 친구 두 명과 ‘웨일러스’' 라는 그룹을 결성해서 활동했어요. 

그룹 활동을 하며 운 좋게 제가 유명해졌고, 사람들은 '웨일러스'가 아닌 '밥 말리와 친구들' 이라는 별칭으로 저희 그룹을 불렀어요. 

그런 저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그룹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변화에 불만을 품은 멤버 한 친구가 그만두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죠. 

당시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프로듀서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 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렇게 팀을 떠나간 그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 밥 말리는 백인 장교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는데, 정작 그가 가장 힘들게 느꼈던 것은 그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라 기억한다고 전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한 유년기 시절을 보냈기에 그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부를 것을 꿈꿔왔다고 한다.

T: 생존해 있는 8명의 말리 외에도 7명의 자녀가 더 있었네요 와우. 그들도 음악가인가요?

B: 탁월한 유전자 때문인지 다들 음악을 합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게다가 더 다행인 것 은 그들은 저처럼 가난하게 음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 

아빠인 제가 아이들이 돈 걱정은 하지 않게 끔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해요. 제가 다 부러울 정도네요 (웃음). 

하지만 이 세상은 ‘Money Can't Buy Life’ 죠. 아이들도 벌써 40대, 50대 나이에 접어는 중년이네요, 이런…

T: 말리 씨의 자녀들 중 막내가 1978년생이던데, 그럼 말리 씨가 33살 됐을 때 이미 15명의 자녀가 있었던 거네요. 그... 그래서 레전드로 모시게 된 거랍니다. 

 B: 하하, 뭐 그런게 레전드라고 할 수 있나요? 그냥 인생 살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웃음). 그러고 보니 제가 죽은 뒤 발매된 베스트 음반 이름 역시 'LEGEND’였습니다. 사운드캣과 통하는 인연이 많네요. 

"어떻게 보면 밥 말리는 우스꽝스러운 머리에 차려 입지 않은 누추한 무대 의상. 그리고 담배(혹은 자메이카의 명물 대마)를 입에 물고 찍은 사진 등, 야위고 까무잡잡하고 볼품없는 외모일 수도 있지만 그 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눈을 통해 희망을 봤고 치유를 경험했고 또 한없이 열광했다. 

T: 노래할 때는 악에 받친 모습, 또 평소에는 터프한 항쟁 열사 같은 모습이신데요, 제가 듣기로는 요즘 태어나셨으면 '흥부자' 라고 불리셨을만한 명랑함도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자메이카 사람을 대표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B: 사람의 특성을 잘 파악하시네요. 제가 노래를 유별나게 잘하는 것이 아닐 만큼 자메이카 사람들 중 노래를 못하는 사람은 찾기가 어려울 정도죠. 또 우리 자메이카 사람들은 태생부터 '홍으로 우주정복’이 가능한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우월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은 항상 가난했고 항상 억압 받았죠. 레게음악은 우리를 지배하려 했던 그들을 향한 울분과 분노가 가슴속에서 폭발해 입을 통해 방언처럼 터져 흘러나온 음악이라고 보면 됩니다. 최소한 우리는 레게를 부를 때 만큼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을 얻게 됩니다. 

T: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한 불후의 명곡 'No Woman, No Cry'는 울림이 정말 강한 노래라 생각합니다. 들을 때마다 가슴을 쥐어 짜며 혹시 '나를 위해 만든 노래인가?'라고 생각했답니다. 혹시 맞습니까? 

B: 하하. 아마 많은 여성분들이 자신을 위한 노래라 생각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이죠. 극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 노래는 제 아내를 위해 만든 노래이자 나의 고국인 자메이카에 살고 있는 모든 여인들을 향한 노래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핍박받고 움츠려 든 여인들을 위로하고자 만든 노래이기 도 합니다. 

만약 지금 억울하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이 노래가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줬다면 분명히 기자님을 위한 노래가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레게 그룹 '써드 월드’(Third World)의 한 멤버는 “자메이카인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 옛날 슬퍼도 희망을 찾으러 달려가던 때가 생각나 눈물을 흘린다”라고 했다. 울지 말라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적시게 되는 정말 묘한 매력이 있는 노래다. 

T: 책,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에서 말리 씨를 또 만난 적 있었습니다. 평화를 노래한 콘서트에서 암살을 당할뻔하셨다고요? 
B: 말 그대로 당시 자메이카는 혼돈의 도가니였고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실 자메이카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반란과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나던 시기였죠. 저는 그 모든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벌하면서 아찔한 시간들이었죠, 그래도 만약 ‘노래’로 이 시대에 아픔을 겪는 젊은이들을 바꿀 수 있다면 제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음악이 가진 혁명보다 더 강력한 '힘' 입니다. 하지만, 총에 맞았을 때는 정말 아팠어요. You can't imagine. 

T: 혹시 본인의 이름을 건 이어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스 타파라'의 삼색 깃발 이어폰, 큰 인기를 누렸던 걸로 기억해요. 

B: 사실 제가 직접 그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어본 적 이 없어 잘 모르겠네요. (제 생전에는 청음샵이 없었답니다.) 제가 타계 하고 난 후 만난 친구는 제가 이어폰 제조회사 사장인 줄 알더라고요. (웃음) 

밥 말리를 모르는 사람도 밥 말리 이어폰을 안다고 하니 그 이어폰이 어느 정도의 인기였는지 대충 상상은 갑니다. 

T: 혹시 체 게바라 닮았다는 소리 들으신 적 있나요? 분위기가 묘하게 닮으셨어요. 

B: 체 게바라 이어폰도 있나요? (웃음) 자기 이름으로 이어폰 하나 없는 사람이라 누군지 잘 모르겠네요 (웃음). 

아, 요즘 젊은 친구들이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건 많이 봤는데... 그에 못지않게 제 티셔츠도 꽤 많이 팔렸어요. 
그런데 이어폰이 없으니... 누군지 잘 모르겠네요(웃음) 

T: ‘레게의 신'이자 음악 역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인물 ‘말리’ 씨의 생전 인생철학이 듣고 싶어요. 

B: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인싸’는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성장했기 때문에 항상 뒤로 숨으려고 하고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밥 말리는 우스꽝스러운 머리에 차려 입지 않은 누추한 무대 의상.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고 찍은 사진 등, 야위고 까무잡잡하고 볼품없는 외모일 수도 있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눈을 통해 희망을 봤고 치유를 경험했고 또 한없이 열광했다.”

그건 자메이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거 같아요, 우리끼리 모이면 잘 노는데, 외부인들과는 그렇지 못했어요. 

수치스럽긴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아프리칸들은 노예의 삶을 살았고 나의 주장 같은 건 내세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부분 숨어서 울고 아파하고 그러다가 개혁의 바람이 불고 탄압이라는 딱지가 붙은 시대가 닥치면서 우리들도 여러 종류의 집단으로 나눠졌어요.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며 친구 가족에게 등을 돌리는 자메이카인들도 부지기수였죠. 그런 모습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에 처절한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개척해야 하는 거잖아요.. 빈곤하고 나약했던 모습들이 우리 스스로의 잘못도 아니구요. 이런 우리 자메이카의 현실을 세계에 대변하기 위해 정말 끊임없이 음악을 만 들었어요. 

저는 죽기 직전까지 콘서트를 했어요. '흥겨운 음악으로 함께 노래하며 힘을 내자. 불의에 타협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 
지난날 우리 자메이카인들의 삶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져 저랑 어울리지 않는 멋진 말만 했네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하자면 '눈을 뜨고 내면을 바라보라, 당신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만족하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의 답을 들어보세요. 

* 밥말리는 1945년에 태어나 1981년도에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전세계를 돌며 콘서트를 하고 자신의 음악에 담긴 여러 메세지를 통해 나라와 시대의 아픔을 알렸다. 
암에 걸린 걸 알면서도 계속 콘서트를 강행해 몸에 무리가 갔던 걸로 알려져 더욱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T: 전달하신 메시지에 대한 답을 꼭 찾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레전드’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B: Keep going.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No Frustration, No Cry! 

T: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살펴 들어가세요.. 아, 가시기 전에 싸인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내가 간직한 나의 오랜 영웅 밥 말리의 모습은 흐느적 흐느적 인생을 초월한 모습, 세상을 조롱하듯 노래하는 자유영혼, 가사와 가락도 제 맘대로 표현해내는 ‘소울' 넘치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밥 말리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전세계 가수 연합의 '기장'과 같은 면모를 가졌다. 

연합의 회장이 자본주의라면, 기장은 저항정신으로 무장한 전투력과 추진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자칫 딱딱했을 투쟁을 천재적인 음악성이 샘물처럼 촉촉하게 뒷받침해주었고, 그를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그러한 생명력을 주는 것이다. 
한 자본주의 사회의 리더는 대마를 '악마의 잎사귀’로 부르며 이를 만들어낸 자메이카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의 축’이라 몰아세웠다. 

하지만 최근 그 리더의 나라에서는 대마를 합법화하고 스스로 기념비적인 일이라 자축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악'으로 쐐기를 박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바로 말을 바꾸는 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를 이끄는 밥 말리 정신에 반하는 리더의 실체인 것이다. 

밥 말리가 저항하고자 했던 부분 역시 이러한 혼란속에서 들이대어진 잣대의 부 당함에 대한 외침이었다. 

이에 근거 없는 처벌과 모욕을 겪고 주저 앉아있던 자메이카인들에게 “모든 게 곧 괜찮아질거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해본다. 

*밥 말리는 킹스턴과 에티오피아로부터 온 영혼의 반란자, 그리고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으로 무장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 

또 그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담아 온몸으로 뿜어 내는 불꽃, 또 그의 목소리가 뿜어내는 화염, 그의 무대를 실제로 본다면 모든 관중은 그의 호전성과 그 '의 아름다움에 압도될 것이다. 

그런 그의 무대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1980년도 외신 기사 “About Marley" 에서 발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창고에서 먼지 묻은 01/w FD 건반을 꺼냈다. 

“나는 과연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남기며 살고 있나. 문득 너무나 음악이 다시 하고 싶어졌다. 
음악하자. 꼭 오늘만 살다 죽을 것처럼 치열하게.

<글 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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