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풀 보이스 바비킴
깊게 눌러 담은 감성에서 피어나는 호소력
소울풀 보이스 바비킴

…그래서 한때는 원망하던 적도 있었죠. 잠깐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한 바비킴은 나지막이 대답을 이어갔다. 저도 트럼펫을 곧잘 불었거든요.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식의 재능이 못 미더 우신 건지, 수석 연주자를 꿰차고, 관객이 가득 찬 콘서트장에서의 솔로 연주도 만족스럽지 못하셨나 봐요. 아니 어쩌면 재능만 가지곤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틀림없이 자신이 걸어간 가시밭 길을 똑같이 걷지 않길 바라셨던 거겠죠.
돌이켜보면 숨죽여 울고 홀로 눈물을 훔치던 날들이 떠올라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대들고 반항도 하며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 저도 아버지를 닮아가는 거 같아요. 묵묵히 보여주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따라 이젠 매일같이 톤을 다듬고 기본기를 연습하게 되었네요. 아버지의 엄한 반대가 없었다면, 아버지께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바비킴이라는 가수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반대를 거듭하시면서도 항상 음악을 들려주시고, 스스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던 때를 떠올려보면, 그 시절 이미 인정하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지…. 하하, 나이가 드니 자꾸 감성적으로 변하네요. 오늘 저녁은 부모님 댁에서 한 잔 해야겠어요.

안녕하세요. 바비킴 님. 다시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저보다 구독자분들이 더 반가워하실 거 같은데, 먼저 구독자분들께 인사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레전드매거진 가족 여러분. 저 바비킴입니다. 오랜만에 디지털 싱글로 다시 돌아왔고요. 조금씩이지만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이렇게 싱글을 발매하자마자 찾아주셔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진솔하게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근황을 물으며 인터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셨나요?
무대에서 올라 팬들과 소통을 업으로 삼는 가수인데, 팬데믹으로 인해 공연이 어렵고, 행사 참석도 힘들기 때문에 어떻게 든 얼굴을 비추고 싶다는 생각이 큽니다. 저를 잊지 않고 기다려주시는 팬들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부딪히는 대로 다 하고 있으며, 예전보다 많은 활동을 하겠다고 회사와 약속도 했죠. 최근엔 유튜브 채널 BOBBY KIM’S CLUB을 개설하여 노래는 물론이고, 저만의 삶, QnA 등 다양한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근황이라면 새로 발매한 싱글 〈태양처럼〉에 대한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죠. 이번 앨범의 탄생 배경이 궁금합니다.
태양처럼은 2년 전, 윤시내 선배님 특집으로 진행된 〈불후의 명곡〉 출연에서부터 시작돼요. 그때 ‘인생이란’이란 곡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멜로디는 물론 가사가 제게 너무 와 닿았어요. 여담이지만 그 곡을 불러 우승하기도 했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김종환 선배가 작사한 곡이더라고요. 그 후로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많은 분들이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잖아요. 대중들에게 힐링이 될만한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었고, 저 또한 부르면서 치유 받는 곡을 부르고 싶은 심경에 러브콜을 보내게 되었죠.
김종환 선배님과의 호흡은 어떠했나요?
선배님은 상당히 진지하신 분이었고 제가 가진 장기를 많이 파악하고 계셨어요. 또 자신의 음악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한 그림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노래의 멜로디나 음정을 떠나서 가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제가 가진 소울로 끄집어내길 바라셨어요. 그 덕에 마음에 드실 때까지 대 여섯번씩은 녹음 해야 했죠. 어느 날은 밥을 먹다가도 불려 나가서 녹음하기도 하고. (웃음)

우리 곁으로
돌아온 바비킴
이번에는 방송 활동에 관한 질문을 드려볼게요. 예능에도 종종 얼굴을 비추셨지만 그보다 경연 프로그램에 더 집중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요즘은 순전히 자신의 노래를 가지고 오를 수 있는 방송 무대가 많지 않잖아요. 물론 예능에 나와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그보다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경연 프로를 자주 나오게 되었어요. 사실 저한테는 쉽지 않은 도전이긴 해요. 아무래도 경연이라면 커다란 성량이나 힘차게 뻗어나가는 고음이 청중에게 어필하기 쉽거든요. 제가 객석에서 들어보니까 그 차이를 더 확연히 느끼겠더라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는 반대 스타일로 노래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요즘 음악 씬이 저한테는 힘든 시기이기도 하지만 저를 계속 기다리신 팬들을 위해 열심히 도전하였죠.
그러면 어떤 무대에 섰을 때 가장 긴장되셨나요?
〈나는 가수다〉입니다. 그때가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을 거예요. 복귀를 위해 매니지먼트와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마침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던 나가수에서 섭외를 받아 출연하게 되었는데요. 제게는 나가수가 첫 경연 프로다 보니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는 데다가, 촉박한 일정으로 인해 빨리빨리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힘들었어요. 심지어 프로 뮤지션들과의 경쟁 속에서 점수가 매겨 지고 생존이 결정되다니! 그런 방식이 낯설고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죠. 일주일이 이틀처럼 느껴질 만큼 바쁜 일정을 보내는 등 심적으로 여유가 없어 초반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말도 못 하게 긴장했던 기억이 나요.
바비킴의 탄생

이번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비킴이라는 예명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제가 만으로 2살 때 저희 식구들 모두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게 됐어요. 그곳에선 브레디 번치(The Brady Bunch)라는 시트콤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거기 나오는 막내의 이름이 ‘바비’였어요. 한국으로는 〈남자 셋 여자 셋〉 같은 작품이라 즐겨봤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누나가 저를 바비라 부르기 시작하더라고요. 시트콤의 바비는 매일같이 넘어지고, 울고, 사고 치는 전형적인 미국의 막내아들이었는데 어쩌면 그런 모습이 저와 조금 닮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부모님도 이내 절 바비라 부르게 되었죠. 마침 제 영문 이름인 로버트의 애칭이 바비이기도 하고, 부르기도 쉽고 귀여운 이름이라 금세 제 본명을 대신하게 되었죠.
상당히 이른 나이에 이민을 가게 되셨네요.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노래에 관심을 갖고 계셨나요?
아버지가 트럼펫 연주자시다 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선 항상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저도 아버지를 따라 트럼펫을 배우기도 했고, 가족 중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면 얼른 나와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등 어릴 때부터 끼가 있었다고 해요. 바비킴은 흑인음악에 빠져 살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분도 많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당시 빌보드 차트 안엔 여러 장르가 섞여 있어 랩이던 발라드던 가리지 않고 좋아했어요. 음악적으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된 시절이었죠.
1세대 힙합퍼
힙합 할아버지

맞아요. ‘고래의 꿈’이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바비킴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확고히 인지시키셨죠. 하지만 사실 그전부터 1세대 힙합퍼로 씬에서는 이미 유명하셨잖아요.
하하, 유명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90년대 초반, 제가 귀국할 무렵 미국에선 이미 힙합이 부흥하고 있었고, 한국은 발라드가 득세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다 댄스 열풍이 불고, 힙합은 더 나중에 2000년을 기점으로 붐이 일기 시작하던 거로 기억해요. 그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죠. 오디션도 많이 봤는데 랩 실력을 눈여겨본 프로듀서를 만나며 ‘닥터레게’에서 활동했었고, 또 한때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고…
본격적인 힙합퍼로 활동하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90년대 말부터 같아요. 그 무렵부터 국내 가요에도 랩이 도입되며 수많은 댄스 곡과 여러 아티스트의 노래에 코러스와 랩 피처링을 맡게 되었죠. 또 힙합 콘셉트의 앨범 『Holy Bumz Presents』를 내기도 했고, 드렁큰타이거나 업타운 같은 힙합 동료들을 만나 친분을 쌓으며 의욕적으로 ‘부가 킹즈’를 결성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사실 생각만큼 잘 풀리진 않아 음악을 계속하는 데에 고민이 많던 시기이기도 해요. 내 음악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가 싶어 개인 활동보단 프로듀싱과 세션에만 전념하던 중 윤미래 씨의 권유로 솔로 앨범을 한 장 내게 됐어요. 그게 시작이 되었죠.

고래의 꿈이 실린 『Beats Within My Soul』을 말씀하시는 거죠? 발매 당시 히트를 예상하셨나요?
전혀요. 무명시절이 워낙 길기도 했고, 여러 실패를 겪어서 제 음악에 대한 자신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어요. 당시 윤미래 씨의 홍보 이사이자, 현재는 저희 소속사의 대표님과 앨범이 망하면 같이 떡볶이 장사를 하자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점차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오고 있으니 망하지만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서서히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앨범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어요.

댓글
댓글 쓰기